본문 바로가기

화성학

하늘이 내린 천재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위대한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 대하여...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클래식 작곡가 중 

이 세상 사람 중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위대한 작곡가이자 연주가인

베토벤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앞으로 곡 분석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될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베토벤 합창 교햑곡 중 일부분 발췌

 

 


▶ 생애

베토벤의 생애는 그의 음악 양식과 결부 지어 초기/중기/후기(1기/2기/3기)로

분류하는 것에 관례화 되어 있습니다.

 

* 전기 - 태어난 곳인 독일의 본 시절부터 모차르트, 하이든의 영향이 느껴지는 빈 전기 시기까지를 말합니다.

* 중기 - 모차르트, 하이든의 영향에서 벗어나 본인만의 작곡법을 수립했던 1810년대 후반까지를 말합니다.

* 후기 - 청력을 완전히 잃은 후 본인만의 작곡법의 독자성을 넘어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했던

           생애의 마지막 시기입니다.

 


▶ 전기

1770년 12월 17일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다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독일로 이주하여 본 궁정의 악장을 지냈고,

아버지인 요한도 궁정 가수가 되었지만 잦은 폭음으로 목소리가 상해 버렸습니다.

요한은 심한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아들 베토벤이 연주회 등에서 벌어온 돈도 술값으로 탕진했을 정도

였습니다.

 

요한은 아들 베토벤의 재능을 알아챈 후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처럼 아들을 이용해

돈과 명성을 얻을 속셈으로 어린 베토벤에게 피아노 연습을 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아들을 팔아 유명세를 타는 것을 부러워했던 요한은 자기 아들도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만들어 돈을 벌려고 했지만, 베토벤은 그의 첫 공연에서 모차르트만큼 강한 

임팩트를 대중들에게 주지 못했기 때문에 신동으로 부각되지는 못했습니다.

 

11살 때에는 재능을 인정받아서 궁정음악가 그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를 만나 본격적으로

음악의 기초를 배우고 오르간 보조 주자로 일하게 됩니다.

 

13살쯤에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변주곡(WoO 63)에는 

네페의 영향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1789년에는 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 주자 겸 부지휘자가 되었는데,

이때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를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1792년에는 고향의 귀족들과 절친들의 도움으로 부친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에 빈으로 

떠났고, 빈에서 저명한 음악가인 하이든에게 배울 수 있도록 주선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이든의 지도방식의 베토벤이 불만이 많았고, 하이든에게 베토벤은 불성실한

학생이었기 때문에 서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뛰어난 즉흥연주를 좋아하는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모임에서 연주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든든한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생계에 곤란함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공작의 후원으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유럽 각지에도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1800년에는 1번 교향곡과 6곡의 현악 4 중주곡을 발표해서 성공을 거두면서 연주가로서, 또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때에 그의 작품은 하이든과 모차르트라는 대작곡가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베토벤은 이때부터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기 시작합니다.

 

'미국 베토벤 협회'에서 베토벤으 머리카락을 분석한 결과 납 중독으로 인한 

난청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산엽혁명으로 사람들은 오염된 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즐겨 먹었고,

생활용품을 납으로 제작해 사용했다고 합니다.

베토벤은 납으로 만든 하모니카를 연주했고, 이 때문에 납에 중독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베토벤은 청락 장애라는 질병 때문에 유서를 쓸 정도록 고통스러워했으나,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서를 쓴 후 걸작을 내놓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결심을 한 후 

많은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 중기

1804년에 자신의 3대 교향곡 중 첫 번째 작품인 3번 교향곡 '영웅'과

피아노 소나타 분야의 한 획을 그은 '발트슈타인(op.53)'을 작곡했습니다,

이 영웅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영웅 고향곡부터 약 10년간 베토벤은 많은 걸작을 창작했습니다.

 

1805년에는 오페라 '피델리오'를 작곡했고, 5번 교향곡 '운명', 6번 교향곡 '전원'과

피아노 협주곡 4번과 제5번 '황제', 바이올린 협주곡 등 다양한 작품이 탄생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드러나는 그의 음악세계는 구의 청력 상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청력이 악화된 이후로 사람들과의 만남 대신 독서와 사색을 즐겼으며, 이것이 그의 음악적

깊이를 갖추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는 말이 있기도 합니다.

 

1815년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유럽의 정세가 안정되었습니다.

정세가 안정되자 오스트리아 빈 청중의 음악 취향도 바뀌어서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의 작품은 이런 추세와는 달라 창작 활동이 잠시 주춤하게 되었으나

더욱 깊어진 음악을 창작하게 됩니다.

 


▶ 말년

말년으로 갈수록 베토벤의 생활은 궁핍해졌지만, 그의 음악은 점점 깊어졌으며

대위법적인 성향이 강해지게 됩니다.

여태까지 보기 힘들었던 복잡한 구조와 큰 규모를 가진 대작들이 창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후기 교향악을 대표하는 '장엄미사(Missa Solemness)'와

9번 교향곡 '합창'이 작곡되었으며 피아노 소나타 29-32번, 디아벨리 변주곡과 같은

큰 규모의 작품들이 작곡되었습니다.

 

→'합창'교향곡

합창 교향곡의 초연은 1824년 5월 7일 빈에서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베토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베토벤이 직접 지휘를 하였고,

보조 지휘자가 또 무대에 올랐습니다.

당시 악단원들은 2명의 지취를 동시에 보며 연주해 나갔다고 합니다.

마지막 4악장까지 끝난 후 베토벤은 청중들의 박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었고, 알토 가수 웅거가 베토벤을 부축해 돌려세워서 청중의 

엄청난 환호를 보게 하자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생애 마지막에는 현악 4중주 곡을 대거 작곡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죽기 직전까지도 많은 작품을 구상했습니다.

 

죽음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찾았습니다.

베토벤과 2km도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던 슈베르트였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지인들의 주선으로 죽기 진전에야 어렵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악보를 보고 크게 감탄했다고 합니다.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은 친구들과 지인, 제자와 비서 앞에서 

잠들었습니다.

 

 

 

 

 


베토벤의 20대 중반부터 시작된 청각장애는 40대 중반이 되어서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음악가로서는 최악의 질병을 얻은 셈인데요,

들리지 않은 귀로 수많은 대작을 탄생시킨 베토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베토벤의 곡 중 일부분을 분석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