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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학

베토벤의 스승 하이든(Franz Joseph Haydn)에 대하여...

베토벤의 스승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은 누구인가?

 

 

그동안 기초 화성학에 대해 공부했었습니다.

다음 포스팅부터는 고급 화성학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어느 공부든 기초가 가장 중요하다는 거 다들 알고 계시죠?

고급 화성학에 대해 공부하기전에 제가 올린 기초화성학 포스팅을

한 번 더 봐주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이번 포스팅은 고급화성학에 대해 들어가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져

보려고 합니다.

 

바로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하이든(1732년~1809년)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차 수리공이었고, 누나 한 사람을 포함한 12형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6세에 음악의 재능을 인정받고 수양 아저씨(프랑스)의 집에 맡겨져 교육을 받게 됩니다.

 

▶ 오스트리아 빈에서의 생활

빈에서의 음악 생활은 그야말로 방랑의 시절이었습니다.

8세에 성 슈테판 교회에 소년 소프라노로 채용되어 탁원한 기량으로 관심을 받았지만,

17세 때 변성기를 겪으면서 합창단을 그만두게 되었고, 이후부터 어려운 방랑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1759년 27세가 되던 해에 겨우 보헤미아의 모르친(Morzin) 백작의 음악대 악장으로 

취임하여 교향곡 '제1번'을 완성했습니다.

 

1760년에는 연상의 아내와 결혼을 했지만 행복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1761년 29세에 아이젠슈타르 성주인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관현악단 부악장에

임명되었습니다.

하이든은 교향곡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여기서 작곡하였습니다.

1772년 '고별 교향곡'이 작곡되기도 합니다.

 

관현악단의 부악장을 역임하면서 관현악 작법도 많은 발전을 보이게 됩니다.

이후 악장으로 임명된 하이든은 단원과의 사이는 매우 원만해서

교향곡 외에도 단원을 독주자로 하는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많이 섰습니다.

작곡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전유럽에 퍼져갔지만, 후원자인 니콜라우스 후작이 1790년에

타계한 후 관현악단도 해산되었기 때문에 빈으로 거처를 옮기고 생애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 런던으로의 여행

빈에서의 하이든은 크게 관심받지 못한 음악가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의 명성이 널리 퍼져나갔고, 그를 악장으로 초빙하려는

곳도 있었습니다.

 

하이든의 눈길을 끌게 된 곳은 영국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이 주최하는

연주회였습니다.

노령인 하이든에게 있어 런던으로의 여행은 무리가 가는 부분이 이었으나, 우수한 런던의

대관현악단의 매력에 끌러 런던을 방문하게 됩니다.

 

이렇게 처음 방문한 런던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잘로몬 교향곡'중 제93번에서 제98번에 이르는

6곡의 완성이 그 최대의 수화이었습니다.

또한, 1792년 여행 중 독일 본에 들러 베토벤을 만나,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 다시 런던으로...

1793년 1월 61세의 하이든은 다시 런던행을 고집했는데, 이때 제98번에서 제104번까지의

마지막 6곡의 교향곡이 완성되었는데, 이 6곡 모두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영국에서의 하이든의 명성은 이번에도 전과 다름없었으며 연주회나 레슨에 의한 수입도

컸습니다. 이런 영국에서의 명성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마침내 하이든을

인정하게 됩니다.

 

▶ 하이든의 만년

젊은 시절 악장으로 충실히 활동했지만 해체되었던 에스티르하지의 관현악단이

재건에 착수하였고, 하이든은 다시 한번 악장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무렵 하이든의 관심사는 오라토리오 제작에 쏠리고 있었는데, 영국에서 들었던

헨델의 "메시아"가 커다란 자극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798년 66세에 완성한 '전지 창조'의 초연은 대성공이었고, 소문은 빠르게 여러 나라로

펴져 나갔습니다.

이렇듯 충만한 만년에 나폴레옹 군과의 관계가 긴박했던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하이든이

오스트리아 국가를 작곡한 것은 큰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1801년 오라토리오'사계'를 완성한 뒤 하이든의 건강은 안 좋아지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악장을 그만두고 은퇴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창작을 그만둔 후에는

자신의 작품 목록 작성에 힘을 쓰게 됩니다.

 

1809년 5월 31일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하이든의 가장 큰 공적은 소나타 형식에 바탕을 둔 고전파 기악 양식의 완성에 있습니다.

하이든은 상사에 대해서는 복종을 하는 보수성을 가진 음악가였지만, 노령의 나이에도

영국을 재차 방문하여 대성공을 거두는 발전성까지 겸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양면성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고전파의 기악 양식을 발전시킨 것입니다.

 

전통을 중요시하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면 발전하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까요?

 

하이든은 그런 성격이었고,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하이든의 인생이 그대로 곡에 남아 있습니다.

 

이상 하이든의 일대기였습니다.